가에서 힣까지

안녕하세요. 민구홍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제 글쓰기의 결과물인 「가에서 힣까지」(From Ga to Hih)제1회 외솔국제타이포그래피 공모전에서 그란샨(Granshan) 어워드를 수상했습니다. 한글을 사랑해야 마땅한 한국인으로서 제가 평소 존경해온 한글 학자 최현배 선생의 순우리말 호인 ‘외솔’은 ‘소나무 한 그루’를 뜻합니다. 선생은 운동가로서도 특히 청년들에게 말의 힘, 나아가 글자의 힘을 강조했죠. 순우리말을 비롯해 가로쓰기를 주장하며 오늘날 한글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힘쓴 선생과 이렇게나마 연결됐다는 사실이 그저 즐거울 따름입니다.

한편, 글쓰기의 또 다른 결과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흔히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이도(李裪, 1397~1450)가 1443년에 발표한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 시스템으로, 2년여의 베타 테스트를 거쳐 일반에는 1446년 『훈민정음』(訓民正音)을 통해 처음 소개됐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한글의 첫 번째 버전명이기도 하다.) 이 시스템으로 생성할 수 있는 글자의 수는 ‘가’에서 ‘힣’까지 무려 1만 1,172가지에 이르며, 이는 초성자 열아홉 개, 중성자 스물한 개, 종성자 스물여덟 개를 조합한 결과다. 한글은 1447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시작으로 『홍길동전』(洪吉童傳)을 거쳐 공백, 마침표 같은 특수문자 등과 어우러지며 6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글을 포함해) 수많은 콘텐츠를 생성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신제품 「가에서 힣까지」(From Ga to Hih)는 한글을 중심으로,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살포시 탐구한다. 제품은 한글 글자 1만 1,172가지 가운데 네 가지와 화면상에서 구현할 수 있는 색 1,677만 7,216가지를 무작위로 조합해 0.25헤르츠마다 한 가지 이미지를 생성한다. 눈 밝은 이라면, 그리고 한글을 사랑하는 이라면, 여기서 자신만의 글자(예컨대 ‘사랑’이나 ‘증오’, 또는 ‘민구홍’이나 ‘매뉴팩처링’ 같은)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제품은 웹 기술로 제작된 덕에 누군가 웹 브라우저를 종료하는 권능을 발휘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작동한다. 참고로 글자체는 길형진이 개발한(또는 편집한) 프리텐다드(Pretendard)를 활용했다.

한편, 영국의 디자이너 폴 엘리먼(Paul Elliman)은 1998년 봄 『아이 매거진』(Eye Magazine)에 실린 「내 타이포그래피」(My Typographies)에서 타이포그래피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텍스트는 사물에 인상을 부여한다. 반대로 사물이 텍스트에 인상을 부여할 수 있다.

이 말을 민구홍 매뉴팩처링 식으로 편집한다면, 텍스트는 이미지에 인상을 부여한다. 반대로 이미지가 텍스트에 인상을 부여할 수 있다.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그란샨은 전 세계 비주얼 아이덴티티의 허브를 자처하며 비라틴 글자체와 타이포그래피, 디자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지역 사회와 기업이 균형을 이루며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단체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본받고 싶을 만큼 훌륭한 일에 매진한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