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무슨 색일까요?

안녕하세요. 민구홍입니다.

저는 주말이면 취미 삼아 작곡과 번역에 심취하곤 합니다. 한 언어를 다른 하나로 옮기는 일인 번역은 어떤 질서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흩어져 사라지려는 생각과 말을 특정 매체로 붙잡는 작곡이나 글쓰기, 나아가 디자인까지 번역일 수 있겠죠. 2023년 4월 4일 브와포레(BoisForêt)에서 출간한 밥 길(Bob Gill)『세상은 무슨 색일까요?』(What Colour Is Your World?)는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가 쓴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Forget all the rules you ever learned about graphic design. Including the ones in this book.)를 번역한 지 5년여 만이죠. 출판사의 허락을 구해 「옮긴이의 글」을 이곳에 다시 옮깁니다.


2021년 11월 9일 세상을 떠난 밥 길은 자신을 “그래픽 디자이너, 카피라이터, 교육자, 아트 디렉터, 일러스트레이터, 영화감독 겸 엉터리 재즈 피아니스트”로 소개하곤 했습니다. 1931년 1월 17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60여 년 동안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솜씨를 발휘했지만, 일찍이 여섯 살 무렵부터 일러스트레이터와 디자이너를 꿈꿨다고 밝혔듯 그의 이름은 디자인계에서 특히 도드라집니다.

밥 길의 작품은 대개 일러스트레이션과 타이포그래피가 산뜻하게 어우러집니다. 유쾌한 동시에 자못 진지하고, 무엇보다 쉽고 명확합니다. 화려한 장식이나 복잡한 레이아웃에 기대기보다 가장 중요한 것, 즉 의사소통에 집중하죠. 그는 디자이너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고, 좋은 디자인이란 쉽고 명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디자인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는 오히려 나중 일이었고요. 그렇게 그는 디자인을 둘러싼 기존의 틀을 구부리거나 허물었습니다. 좋은 생각과 태도가 곧 좋은 디자인의 뿌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한편, 그는 뉴욕의 시각 예술 학교, 런던의 왕립 예술 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스무 권 이상의 책을 통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특히, 1981년에 발표한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에서는 ‘문제가 문제’라 말하며 자신이 맞닥뜨린 문제를 곧장 해결하려 하기보다 문제를 바라본 뒤 다시 규정해보라고 조언했습니다. 단순하지만 독특하고, 실제로 적용해본 뒤에는 무릎을 치게 만드는 그의 방법론은 디자이너는 물론이고 수많은 생산자에게 영감과 용기를 선사했죠.

디자이너와 교육자로서 생각과 태도를 향한 그의 믿음은 이 책 『세상은 무슨 색일까요?』로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그의 다른 작품처럼 일러스트레이션과 타이포그래피가 산뜻하게 어우러지는 건 물론이고요. 책은 정원사에서 바닷가를 서성이는 사람, 군인, 벽돌공, 우유 배달원, 왕, 잠수부, 천문학자, 그리고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을 따라가며 질문을 건넵니다. “세상은 무슨 색일까요?” 저마다 쉽게 답을 내놓는 다른 사람과 달리 예술가는 선뜻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예술가에게 색은 생각과 태도에 따라 얼마든 달라질 수 있는 까닭입니다. 책을 마무리하는 예술가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곱씹어볼 만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겠죠. 책 첫머리에 자리한 각주처럼 모두 “틀린 것도 아니고, 맞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방식이 다를 뿐이랍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발 디딘 분야에서 예술가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달리 말해 수많은 가능성을 믿는 것은 이따금 필요한 일입니다. 자신의 세상이 흰색뿐일지라도 그 과정에서 흰색 안에 여러 흰색이 있을 수 있음을, 또는 흰색이 그저 흰색이 아닐 수 있음을 알게 될 테니까요.

“토마토가 과일일까?”

언젠가 한 친구가 제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제 답은 이랬습니다.

“글쎄… 누군가에게 토마토는 엄연히 과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닐걸. 그런데 진실이 어떻든 토마토를 과일로 믿으면 과일이 되지 않을까?”

이 책이 처음 출간된 해인 1962년은 밥 길이 친구인 앨런 플레처(Alan Fletcher), 콜린 포브스(Colin Forbes)와 디자인 스튜디오 ‘플레처/포브스/길’을 막 시작한 무렵이기도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이따금 불안한 시절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작은 모름지기 불안과 함께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19세기 말을 드리운 불안이 크고 작은 담론과 문화적 욕구를 폭발시키고, 20세기 초 벨 에포크(Belle Époque)로 이어졌듯 불안은 가능성을 품은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책은 불안과 마주한 밥 길 자신을 비롯해 책 첫머리에 등장하는 그의 친구인 앨런과 콜린을 향한 응원의 메시지였을지 모릅니다. 그 아름다운 힘 덕일까요? 그들의 스튜디오는 오늘날 세계적인 디자인 회사로 손꼽히는 펜타그램(Pentagram)으로 거듭났고, 이 책은 이렇게 한국에서까지 소개됐습니다. 이 책이 또다시 질문을 건네는 사람은 어린이뿐 아니라 그의 부모, 나아가 불안한 가운데 수많은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을 아우릅니다. 출간된 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전으로서 사랑받는 까닭이겠죠. 저를 비롯해 그들의 손이 늘 닿는 곳에 이 책이 놓이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무슨 색일까요?” 꼭 책이 건네는 질문에 답하지 않더라도 밥 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감상하는 일만으로도 흐뭇합니다.


최규호 님이 디자인한 이 책은 슬기와 민이 디자인한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와 동일하게 원서의 디자인을 거의 고스란히 번역한 결과물입니다. 표지에는 AG 마당 돋보임이 사용됐고요. 한편, 디자인이든 번역이든 제법 오랫동안 공을 들인 만큼 최규호 님과 저는 이 책 어딘가에 서로의 사심을 담아보기로 했죠. 이 책이 제 생일인 3월 5일에 인쇄되고, 최규호 님의 생일인 4월 4일에 출간된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