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민구홍입니다.

2000년 개봉한 스릴러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American Psycho)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등장합니다. 어쩌면 영화 자체보다 더 유명할지 모를, 이른바 ‘명함 전쟁’이죠. 영화 내내 활극이 펼쳐지고 선혈이 낭자하는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정적인 동시에 특히 유쾌한 장면입니다. 가만히 지켜보노라면 시샘 많은 특정 디자이너들의 정기 모임 같기도 하고요.


1980년대 미국 뉴욕 월 스트리트, 어느 날 아침.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먼(Patrick Bateman, 크리스찬 베일[Christian Bale] 분)이 동료들과 회의실에 앉아 있습니다. 양복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탁자 위에 밀어놓는 베이트먼. “새 명함이야. 어때?” 동료들은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허, 죽이는데?” 베이트먼이 의자에 기대며 말합니다. “어제 막 인쇄소에서 가져왔지. 아직 잉크도 안 말랐어.” 한 동료가 말합니다. “색깔 좋은데?”

“진짜 상아를 갈아서 만들었지. 글자체는 실리언 레일(Silian Rail)이고.” 이때 끼어드는 다른 동료. “아주 멋지군, 베이트먼. 근데 미안하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이걸 한번 봐.” 그는 자신의 명함을 꺼내 베이트먼의 명함 옆에 놓습니다. “좋군…” 쓴웃음을 짓는 베이트먼.

이어서 다른 동료도 명함을 꺼내 탁자 위에 놓습니다. “인상적이군… 아주 좋아.” 중얼거리는 베이트먼. “이제 폴 앨런 것도 볼까?” 탁자에 폴 앨런의 명함이 놓이자 회의실은 이내 조용해집니다. “미묘한 황백색에 글자 두께도 적당해…” 베이트먼의 이마에 주름이 잡힙니다. “오, 젠장. 워터마크까지…”


명함은 누군가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비롯해 직책, 연락처 등을 소개하는 작지만 효과적인 도구입니다. 잘 만들어진 명함의 위력은 실로 무궁무진하죠.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첫인상을 선사해 앞으로 함께하고픈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아메리칸 사이코』에서처럼 샘이 날 만큼 명함 주인의 위상을 바꾸기도 하니까요. 물론 오늘날에는 소셜 미디어가 명함의 기능을 대신한다지만 비록 무참히 버려질지언정 AG 랩에도 명함이 있습니다. 하나는 AG 랩 자체를 위한, 다른 하나는 디렉터인 저를 위한…

얇은 플라스틱 재질에 신용카드와 같은 크기(86 × 54밀리미터)로 일반적인 명함과는 조금 다르지만, 두 명함 모두 안상수체와 최정호체를 오가며 제 역할을 우직하게 수행합니다. 눈 밝은 분이라면 이미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명함의 앞뒷면은 가로로 긴 랩톱 또는 데스크톱 화면과 세로로 긴 스마트폰 기기의 화면을 암시하죠. 이는 오늘날 우리가 웹을 마주하는 두 가지 문 또는 창이기도 합니다. 한편, AG 랩이 다루는 주요한 매체인 웹을 이용해 AG 랩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AG 랩의 웹사이트 또한 그 자체로 AG 랩의 명함, 그것도 ‘끊임없이 확장하는 명함’일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버려질 일도 없고요.

참고로 『아메리칸 사이코』의 다음 장면에서 폴 앨런은 베이트먼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말죠. 명함이 지나치게 근사하다는 이유만으로요. 저 또한 조심해야겠습니다.